한량바라기 2019년 02월 07일

낙서재에서 동천석실까지 고산의 출근길을 따라가다보길도에는 고산이 조성한 세연정 말고도 그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낙서재와 동천석실이 바로 그곳입니다.

낙서재는 고산이 1637년에 보길도에 처음 들어와 1671년 죽을 때까지 살았던 집으로서, 그 터는 풍수지리에 밝았던 고산이 보길도에서 가장 높은 격자봉에 올라가서 주산의 형국을 파악하고 혈맥을 찾아 직접 잡았다고 합니다.

저택의 이름 낙서재(樂書齎)란 독서를 즐기며 학문하는 선비의 삶을 상징합니다. 실제로 고산은 이곳에 많은 책을 쌓아두고 독서하며 자제들을 가르쳤다고 하네요. 비록 지금의 가옥은 복원된 것으로 예전 모습은 알 수 없지만, 그 주변의 풍광만으로도 그가 어떤 삶을 추구했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그는 저택 뒤 자리한 바위를 소은병이라 불렀습니다. 소은병이란 원래 주자가 있었던 중국 복건성 숭안현 무이산의 대은봉 건너편에 있는 봉우리 이름으로서, 고산이 주자를 얼마나 흠숭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주자처럼 산 속에 은거하며 학문에 몰두하겠다는 의지였겠지요. 또한 저택 앞에는 귀암이라 해서 거북을 닮은 큰 바위가 자리하고 있는데요, 기록에 의하면 고산이 저녁에 그곳에 앉아 보름달을 즐겼다고 합니다.

이방인에게 낙서재보다 눈에 띄는 것은 그 건너편 산 중턱에 자리한 동천석실입니다. 길을 가다가도 산 중턱 바위절벽에 있는 만큼 눈이 갈 수밖에 없는데요, 동천석실(洞天石室)의 동천은 하늘로 통하는 곳, 산천경개가 빼어난 곳 또는 신선이 사는 곳을 뜻하는 단어로서, 고산은 이곳에서 석간수를 모아 연못을 조성하고 집을 지어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동천석실 앞에는 또한 고산이 차를 끓여 먹었던 차 바위도 있는데, 말 그대로 차 마시고 공부하고, 고산은 신선 같은 선비의 삶을 추구했을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고산의 삶이 그냥 얻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기록을 보면 고산은 이곳에서 배가 고프면 바위에 매달린 도르래를 이용해서 아래에서 음식을 받아먹었다고 하는데요, 어쩌면 낙서재에서 동천석실까지, 내를 건너고 수풀을 헤치고 산을 올라야 하는 고산의 출근길 역시 그가 아니라 밑의 하인들의 몫이었을지 모릅니다. 그것이 계급사회인 조선에서 양반들인 사는 법이었으니까요.

우리는 옛 기록을 보며 양반들의 삶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그와 같은 생활이 가능했던 것은 역사에 나타나지 않은 민중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고산이 보길도의 어부를 보며 지었던 ‘어부사시사’가 아직까지 전해지는 건 그것이 최초의 우리말 시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그려낸 어부의 모습이 주는 힘 때문이기도 합니다. 역사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일상의 합이니까요. 보길도에서 그려낸 고산 윤선도의 꿈은 그만이 아니라 보길도에 살았던 모든 이들의 꿈이었을 겁니다.

모두가 함께 꾸는 꿈이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 궁금하신 분은 보길도로 가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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